“당신의 말하는 사진이 있다면, 난 우울할 때마다 매번 그것을 돌려볼 거예요. 외로운 작은 방의 침침한 공간에 앉아 당신이 ‘사랑해’라고 속삭일 때마다 박수를 칠 거예요.” _— “Sunny Side Up” (1929)


때로는,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을 때 사랑하는 이의 사진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목소리에서 오는 위안이, 단지 시각적 유사성보다 훨씬 더 안심을 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된 1920년대의 대중가요 가사에서 알 수 있듯, 목소리와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할 때 사랑하는 이는 황홀경에 빠진다. 이 장난스런 작은 노래는, 1920년대를 거치며 청소년기에서 성숙기로 접어든 기록 기술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실제 육체를 지닌 당사자가 반드시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암시까지 담고 있다.¹ 하지만 상대방의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같은 공기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지금(hic et nunc)*이 아닌, “시간을 이동시킨(time-shifted)” 방식으로 친밀한 소통이 이루어지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특정한 영향력 있는 사유의 흐름에 따르면, 우리가 특별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실시간 통화이든, 음성사서함이나 다른 녹음 장치를 통해 저장된 목소리이든—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아기의 포르트-다(fort-da, “여기-저기”) 게임을 되풀이한다. (아기는 엄마의 반복되는 등장과 퇴장을 모사하기 위해 실을 감은 실패(spool)를 갖고 놀며, 그를 통해 그녀가 더 이상 ‘항상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감내하려 애쓴다.) 이를테면 우리는 환상적 메아리들에 둘둘 싸여 있는 셈이다. 엄마의 설명할 수 없는 부재에 상처받고(traumatized) 동시에 그로부터 용기를 얻는다(emboldened).

이 은유적 장면에서, 주체성(Subjectivity)은 내 몸과 의식이 엄마와 분리되어 있다는 ‘고통스런 깨달음’—예컨대 “우유를 주는 사람은 저 옆방에 있고, 나는 여기 있네!”—에서 비롯되는 초기의 고통 어린 인식뿐 아니라, 말(언어)을 처음으로 불완전하게 내뱉는 순간을 통해 형성된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달래는 소리—즉 탯줄을 대신하는 청각적 연결고리—에 의해 젖을 떼면서, 아기는 그 연결을 끊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자기 스스로 신경섬유(nerve fiber)를 엮어서 엄마(또는 타자)의 존재 혹은 부재를 어느 정도 모방적으로나마 통제할 수 있도록, 그것을 실 감개(spool of thread)에 묶는다.²

다시 말해, 아이는 위안, 영양, 관심을 받을 때를 자신이 정할 수 있다고 **‘놀이’**를 통해 확신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 아이는 일단 분리되고 난 뒤엔 자신에게 그토록 강력한 힘(전능함)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상처(트라우마)를 승화시키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주의를 요구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물론 가장 흔한 전략이지만, 이는 곧 효율이 점차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즉, 법칙 “한계효용체감”과 비슷한 것을 깨닫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 유명한 정신분석학적 장면에서, 어린아이는 온갖 욕망(desires), 충동(drives), 공포, 분노, 혼란, 승화, 동일시, 소외, 그리고 어쩌면 짜릿한 해방감까지 뒤섞인 복잡한 욕망의 둥지(nest)에 둘러싸인다. 그리고 그중 상당 부분은 후두와 귀 사이, 즉 언어의 문턱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표현되거나 경험되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실패(spool)를 가지고 포르트-다(fort-da) 놀이를 했든, 혹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또는 심지어 늑대)에게서 자랐든 상관없이, 그 상황의 기하학적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우리는 언제나 흔해 빠진 모나드적 존재의 현실에 대해 정신적 깨달음과 항복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self)**는 **타자(other)**가 아니다. 적어도,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을 규칙적으로, 또 확실히 충족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바로 이 실패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반복적이고 충동(drive)에 이끌리는 행동의 리비도적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관심(attention)을 지닌 타자의 목소리는 강렬한 힘을 지닌 채, 손에 잡히지 않는 객체로 남아 있다. 그 목소리는—어떻게 활용되고, 구애를 받으며, 경험되고, 기억되느냐에 따라—우리의 기분을 간질이는 깃털이 되기도, 반대로 살갗에 아프게 걸리는 가시가 되기도 한다. 로런 벌란트(Lauren Berlant)가 말했듯이, “아마도 욕망이란 두 몸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 이차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목소리와 그것이 만들어 내는 친밀한 애착의 문제일지도 모른다.”(Desire/Love, 12쪽)

시간이 흐르면서, 주체(subject)는 강렬한 감정을 유발할 만한—정서적, 신체적, 심지어 영적 차원에서도—목소리들을 꽤 많이 모으게 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또는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역시 마찬가지)처럼, 우리가 이 음향적 형식(sonic forms)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지는 기원적 영향력만을 추적하는 것으로 만족할 필요는 없다. (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어떤 목소리의 음색, 말투 패턴 등에 대한 끌림 혹은 혐오를 어디까지나 좌우하는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그보다는, 신체적 또는 시각적 차원이 부재한 상태에서 빚어지는 **욕망과 갈망의 정서적 건축학(affective architectonics)**에 초점을 맞춰보려 한다. 이는 요람(crib)에서부터 이미 예고되었고, 보통 도시적 ‘아기방’으로 불리는 성인기의 공간에서도 우리 인생의 많은 순간에 되풀이되곤 하는 필연적 상황이다.

유년기의 “바깥 소음(noises off)”은, 우리가 처음 약 9개월여를 함께 했던 전(前)포괄적 심장박동(heartbeat)에서 확 떼어져 나온 뒤, 그 **유연한 감각체계(sensorium)**가 길러지는 청각적 흐름이다. 이 소리들은 우리가 태아기에서 부모(양육자)에게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끈다. 부모 쪽 대표자는 생물학적으로 아기의 울음소리에 맞춰져 있듯, 아기 역시 양육자가 내는 소리들에 민감하다. 사실, 닫을 수 없는 귀인간의 거주방식(human habitus) 사이의 이 특권적 연결이야말로 아이가 이후 겪게 될 경험들의 **“사랑 톤(love tone)”**을 만들어 준다(이 표현은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의 용어를 슬쩍 빌려온 것이다. “A Stroll through the Worlds of Animals and Men”, 61쪽). 다시 말해, 우리는 언어로 진입하기 전에, 어머니(또는 아버지)가 언어 밖에서 내는 여러 소리를 듣게 된다. 웃음소리, 슬픔의 울음, 고통의 울음, 기쁨(쾌락)의 울음 등이 그러하다. 인지 및 사회적 발달은, 적절히 반응하기에 앞서, 이 다양한 울음 소리를 구분해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아마도 가장 순수한 형태로—“아쿠즈마틱 목소리(acousmatic voice)”, 즉 명백한 시각적 근원이나 출처가 없는 목소리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아이의 **“청각적 신경(acoustic nerves)”**에 직접 작동하는 형태로 말이다(톨스토이, Childhood, Boyhood and Youth). 앞 장에서 살펴봤듯, 아쿠즈마틱 목소리라는 표현은 본래 피타고라스식 교육(pedagogy)의 맥락에서 나왔다. 거기서 스승은 휘장(커튼) 뒤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는 제자들의 시선을 돌리는 방해물이 없도록 하여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고, 동시에 그 목소리에 일종의 신성(神聖)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였다.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도 이런 점을 지적한다. “녹음기(tape recorder)는 피타고라스 커튼의 미덕을 지닌다. 녹음기는 새로운 관찰 대상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관찰 조건’ 자체를 새롭게 설정해 준다.”(“Acousmatics,” 81쪽)

어머니의 쾌락 소리가 아이(그 쾌락을 유발하는 주체가 아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사실은 아버지 때문이라는 점)를 의식하게 만드는 순간, 프로이트의 모델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³

(우리는 이미 요람에서 작은 침대로, 몇 년 뒤로 이동했다.) 따라서, 어머니의 쾌락(주이상스, jouissance)의 소리만큼이나 더 충격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이는 매혹/혐오라는, 비교적 적대적(agonistic) 양가감정이 얽힌 부정적 흥분(negative excitation)을 일으키며, 곧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을 형성한다. 같은 맥락에서, 아버지가 절정에 다다라 내는 신음 역시 복잡한 여과장치 너머로 들린다. 질투, 시기, 경외감, 그리고 가부장적 로고스(logos)가 이상하고 서글픈 불어(不語)적 말투(글로솔랄리아, glossolalia)로 해체될 수 있음을 깨닫는 충격 같은 것들 말이다.⁴

(이를테면 존 랜체스터(John Lanchester)는 남성 독자들을 향해 이렇게 쓴다. “남자가 사정(orgasm) 순간에 내뱉는 그 웅얼거림(또는 외침, 신음, 포효, 혹은 야옹거림)은 정확히, 그리고 들리지 않는 ‘각운’을 이루듯, 바로 당신 자신이 잉태되던 순간 당신 아버지가 냈던 소리와 똑같다.”(The Debt to Pleasure, 94–95쪽)) 이 시나리오에서 흔히 상정되는 “아이”가 남성으로 젠더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해석 모델의 결함 중 하나일 뿐이지만, 가장 두드러진 한계일 수도 있다. 귀와 목소리를 이어 주체화하는 여러 경로를 추적하려면, 특히 그 목소리가 다양한 주체성의 리비도적 경제를 어떻게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려면, 젠더의 문제가 핵심적이다.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章)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노래(“If I had a talking picture of you…”)는 수십 년에 걸쳐 남녀가 번갈아 불러 왔는데, (이성애 중심 규범을 따르듯) 대명사를 굳이 바꾸지 않고도 불릴 수 있었다. 즉, 욕망의 음향적 근원(sonic source of desire)뿐 아니라, 그 동일한 욕망을 다루거나 견디는 데 필요한 음향적 해결책(sonorous solutions)에도 일정한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구조, 그리고 이를 만들어 내고 그 내부에서 생겨나는 젠더적 역학(dynamics)이 다음에서 다루어질 내용이다. 그러므로 (남성) 귀와 (여성) 혀 사이의 그 곤란한 벡터를 더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이제 다른 유형의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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