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lissssstening to Los Angeles.” Soul Coughing, “Screenwriter’s Blues”

“당신은 로스앤젤레스를 듣고 있습니다아아아.”

— 소울 카핑(Soul Coughing), 「Screenwriter’s Blues」

*피에르 셰페르(Pierre Schaeffer)가 말하는 “아쿠즈마틱(acousmatic)”**의 개념으로 자연 혹은 실제로는 도시의 소리를 집중하여 듣는 것은, 우리 종(種) 내의 젠더 구분을 넘어서는 더 급진적인 타자성에 스스로를 조율하는 방식이다. 셰페르는 이 용어를 빌려와 “우리가 지각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들을 더 잘 듣고 묘사할 수 있도록, 오직 더 잘 듣기 위함 외에는 다른 목적 없이 소리의 형상(sonorous forms)을 듣는” 새로운 유형의 청각적 관계를 권장한다(「Acousmatics」, 78쪽). 요약하자면, 아쿠즈마틱 청취란 “소리의 대상을 그 자체로 관찰할 가치가 있는 지각 대상으로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다(78쪽). (여기서 우리는 1913년에 “우리의 귀는 만족을 모르며, 더 큰 음향적 자극을 요구한다”라고 말했던 미래파 예술가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를 인용할 수도 있다. 그는 또한 “더 예민한 귀로 커다란 현대 도시를 가로질러 가자”고 주장했다 [「The Art of Noises」, 11~12쪽].)

생태계와 산업이 서로 깊이 얽혀 있을 때, 환경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모호한 경험이다. 고래의 울음소리가 그렇듯, 전자기 주파수와 거대한 기계 장치로 인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자연(어머니 대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인공적 소음을 피해 달아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저널리즘과 과학 분야에서는 물질적 세계 자체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 한 대중 기상학 웹사이트 기사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지구는 매일 전기적 합창으로 노래를 부른다. 올바른 주파수로 맞추면, 라디오는 타닥타닥·탕탕·휘파람 같은 소리들로 이루어진 이 지글거리는 심포니—수백만 번의 번개가 만들어 내는 선율—를 엿들을 수 있다. 뉴질랜드에 있는 청취자는 알래스카의 화산 폭발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한 새 연구가 보도했다.”¹

자연의 목소리에 “주의 기울이기”라는 맥락에서, 보다 과학적으로 초점을 맞춘 사례를 마그렛 그레보비치(Margret Grebowicz)가 비판적으로 검토했는데, 이는 **더 와일드 파운데이션(The WILD Foundation)**이 후원한 익스트림 아이스 서베이(Extreme Ice Survey)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그레보비치는 이를 “예술과 과학을 결합하여 지구의 변화하는 생태계에 ‘시각적 목소리(visual voice)’를 부여하는 장기 사진 프로젝트”라고 설명한다(「Glacial Time and Lonely Crowds」, 1쪽). 이 환경 프로젝트는 녹아 내리는 만년설과 빙하의 삐걱거리고 신음하는 가청(可聽) 원천들을 기록한 뒤, 이를 “우리가 부여하지 않으면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 풍경들에 목소리를 주기” 위한 것으로 전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선의는 있지만 다소 가부장적인 “목소리를 부여하기” 수사는, 전통적으로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다고 여겨진 이들—이를테면 아이, 여성, 가난한 이들, 식민지화된 이들, 장애인, 동물, 그리고 그 밖의 소외 집단²—에게 목소리를 주는 형태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이제는 빙하나 숲처럼 무생물적인 자연물에까지 확장된다. 그레보비치가 익스트림 아이스 서베이 프로젝트의 사례를 통해 정교하게 보여 주듯, 보존·복원 등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자연”의 대변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이들이나 프로젝트를 더 복잡하게 성찰하고 비판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³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류세(Anthropocene) 시대에, 최소한 생산적인 사고 실험으로서 비유적이지 않은 생태적 목소리, 즉 **“세계의 목소리”(vox mundi)**의 가능성을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어려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전제(목소리 = 소리 + 영혼)에 따르면, 어느 시점에서 목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되어 버리는가? 반대로, 그리고 더 중요하게, 어느 순간에 소리가 목소리가 되는가? (안이한 낭만주의적 혼동이나 투영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말이다.)


¹ “The Earth sings every day, with an electric chorus…” 이하 인용.

² 전통적으로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여겨진 집단.

³ Grebowicz는 Extreme Ice Survey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다.

이러한 질문들을 다루기 위해, 우리는 정전(正典)적 생태학 텍스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Walden)』으로 눈을 돌려 보자. 특히 **“소리(Sounds)”**라는 간단한 제목의 부분에 주목하겠다. 여기서 소로는 다소 흥미로운, 보편화하는 음향적 주장을 펼치는데, 즉 “가능한 한 가장 멀리서 들리는 모든 소리는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곧 우주적 하프로의 진동을 일으킨다”(110쪽)는 것이다. 이 경우 그런 관찰이 나온 계기는 교회 종소리다. 일요일에 바람이 잘 받쳐주면 최소한 네 개의 다른 마을(링컨, 액턴, 베드퍼드, 콩코드)에서 들릴 수 있는 소리로, 소로는 이를 “희미하고 달콤하며,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선율로, 황야에도 옮겨 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109–110쪽) 멜로디라고 묘사한다. 시적 은둔자인 소로에게 이 먼 교회 종소리는 문화를 상징한다기보다, 환경과 유기적으로 융합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숲 너머 충분한 거리에 이르면, 이 소리는 일종의 진동하는 허밍(hum)이 되는데, 마치 지평선 너머의 소나무 바늘들이 그것을 휩쓸어 울리는 하프의 줄인 것만 같다”(110쪽)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메아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원초적 소리이며, 그 점이 바로 메아리의 마법과 매력이다. 메아리는 단순히 종에서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는 숲의 목소리이기도 하다.”**⁴

소로는 청동(종)과 목재(숲)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성적 후렴(polyphonic refrain), 곧 인간적 인공물과 자연 사이의 전통적 경계를 허무는 조화로운 이중주를 묘사하고 있다.⁵

어느 시점에서, 소로는 지나가는 민스트럴(minstrel)—목가적 뉴잉글랜드 시절에는 그런 이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의 노래와 소가 내는 음매 소리를 비교하며, **“결국 그것들은 자연의 단일한 발화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사실, 소로에게 기차의 기적 소리, 교회 종소리, 민스트럴, 소, 그리고 새의 울음소리는 모두 더 큰 자연 질서, 곧 **“우리 모두가 함께 거주하는 그 자연”**의 음향적 직물을 이룬다. 이 후렴은 류트를 연주하는 이와 소(bovine) 사이, 부엉이와 그 울음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흐느낌 사이를 오가며 이어진다. 그는 **“부엉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쁘다”**고 쓰며, **“인간을 대신해 저 멍청하고 광적인 울음소리를 내도록 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어머니 자연이야말로 탁월한 복화술사임이 드러난다.

“마을에서 우는 첫 번째 나무개구리의 울음소리를 정말로 들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소로는 1859년 3월 24일의 일기에서 묻는다. “아! 저 녀석은 얼마나 기상(氣象)에 통달해 있을까! 그는 날씨를 짐작하지 않는다. 자기 나름대로 날씨를 만들어 내고, 날씨가 온화해지도록 북돋운다. 날씨가 무엇이겠는가, 땅의 기질(氣質)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완전히 땅의 일부로서, 그 위에서 살며, 그 일부이기도 한 땅의 피부만큼이나 민감한 존재다. 그의 삶은 땅이 녹아 풀릴 때 함께 이완된다. 그는 3월 바람에 말라 버린 낙엽의 바스락거림과 화음을 이루도록 자기 목소리를 조율하고 조정한다. 서리가 완전히 녹기도 전에, 봄비와 더 따뜻한 날들이 주는 영향을 느낀다. 그의 울음소리는 바로 날씨 그 자체의 목소리다. 그는 온도계의 수은주처럼 오르내린다.”(229–230)

또 다른 일기는 거의 20년 전인 1841년 3월 3일에 쓰인 것으로, 소로가 얼마나 오랫동안 음향적 환경(sonic surround)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자신의 존재에 미치는 영향과 그것을 다시 울려 퍼지게 하는 힘을 중시해 왔는지를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