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사라져 가는 옛 시절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이 책의 앞선 페이지들은 겉보기엔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음향적 친밀성(sonic intimacy)”**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보다 넓은 세계를 등지고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과 관계 속으로 “안으로 돌이키는(turning inward)” 것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체, 행위자(agents), 실체(entities), 사물(objects), 현상들에서 표출되는 **“세계의 목소리(voice of the world)”**에 귀를 기울이려 애쓴다. 언뜻 보기에, 이 두 방향은 서로 상충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후자는 사적·가정적 공간이나 상황 너머로 확장되어, 친밀한 관계를 더 넓은 환경과 연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결국 “바깥으로 확장(opening up)”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꼭 모순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둘은 완벽히 서로를 보완한다.¹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를 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어느 주체(subject)에 의해 그러하게 접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² 게다가 그 세계는, 그 주체가 가진 개인의 **핀홀 렌즈(pinhole lens)**를 통해 접해진다.³ “세계”라는 추상적이며 거시적인 개념은 실제로, 무한히 많고 구체적인 미시적 움벨트(Umwelten)와 경험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친밀한 순간에서 벗어나 더 차가운, 사회적인 상황—이를테면 연인의 침대를 떠나 사랑받지 못하는 지하철이나 사무실로 향하는 순간—에 마주친다 해도, 실제로는 우리의 사적 영역이 그 적대자이자 가능 조건과 새롭게 맞닥뜨림으로써 더 강화되는 셈이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친밀성(intimacy)이란 게 존재하려면,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배경(impersonal background)이 필수라고 확실히 말한다. 이 배경 위에서 친밀성의 마법적 예외성이 창출된다는 것이다.)⁴
하지만 친밀성과 비인격성 사이의 변증법을 넘어, 우리는 후자(비인격성) 안에서도 전자(친밀성)의 실타래를(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찾을 수 있다. 이 둘은 복잡한 패턴으로 얽혀 있으며,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도 어느 한쪽에만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가족 혹은 친구들 간의 친밀한 순간이 사실은 서로 같은 파장 위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순식간에 틀어질 수 있고, 반대로 서먹한 공적 만남이 예기치 않게 유대(bonding)의 기회로 바뀔 수도 있다(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건 꼭 사람 사이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를테면 노인과 컴퓨터 간의 관계 같은 것도 포함할 수 있다).
이 대개 **부인(disavowed)**되어 온 친연성(kinship)을 인정하는 맥락에서, **레오 버사니(Leo Bersani)**와 **애덤 필립스(Adam Phillips)**는 **“비인격적 친밀성(impersonal intimacy)”**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처음 보면 역설(paradox)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보여 주는 도발적이고 직관에 반하는 논증 속에서, 사실상 **존재론적 경험 자체가 지니는 상호 스며드는 결(texture)**임이 드러난다. 버사니와 필립스에게 ‘진정성 있게 산다(living authentically)’는 것은, 정체성(identity)의 사소한 우연성들을 넘어서는, 일반적(generic)이거나 우발적(chance)인 형태들의 친밀성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런 낯선 지향은 대개 함구(緘口)되곤 하지만 공유된 **유한성(finitude)**의 비밀과, 존재의 본질적 얽힘을 드러낸다. 따라서 어떤 경험이든—심지어, 아니 어쩌면 특히 낯선 이들이 인생이라는 무작위 발생 장치에 의해 한데 모였을 때조차—친밀해질 기회가 될 수 있다.⁵
“비인격적 친밀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는 합창단(choir)(혹은 동네 술집이나 파티에서 흥겹게 함께 노래 부르는 광경)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별 목소리들이 서로 겹쳐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음악 그 자체라는 보편적 용액 속으로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연결이 자주 이뤄지기 때문이다.⁶ 합창단 구성원들이 세련되거나 혹은 투박하건 간에, 꼭 사적·개인적인 차원에서 서로 친해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간 목소리가 함께 노래한다는 “보편성(generic nature)”에 힘입어 친밀한 체험을 창출할 수 있다. (여기서 “보편적(generic)”이라는 단어는 폄하의 의미가 아니라, 한 보편적 유형(type), 종류(kind), 장르(genre)를 지시하는 것으로, 그것이 곧 공유된 존재(being)와 경험에 대한 조용하면서도 심오한 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쓰인다. 사실, 우리는 **존재의 ‘어떤-이든(whateverness)’**을 긍정하기를 꺼리고, 어떤 대상의 소위 ‘유일무이한(unique)’ 속성을 치켜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그 결과 “generic”은 종종 모욕으로 사용된다.)
어원적으로, “친밀성(intimacy)”은 라틴어 intimus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가장 안쪽의(inmost), 가장 깊은(deepest), 심오하거나(profound) 가깝다(close in friendship)”를 의미한다. 형용사나 명사 형태에서 “친밀(intimate)”이란, “어떤 것의 가장 안쪽 본성(inmost nature)이나 근본적 특성(fundamental character)에 관계된, 필수적인(essential), 내재적인(intrinsic)”을 뜻한다. (1678년에 토머스 홉스는 “지구(Earth)의 진정하고 친밀한 실체(the true and intimate Substance of the Earth)”라는 표현을 썼다.) 따라서 친밀성은 “어떤 문제에 깊이 또는 밀접하게 들어가는 것… 한 사람의 가장 내면을 건드리는 것”과 관련된다. (실제로, 보수적 태도로 잘 알려진 옥스퍼드 영어사전조차도 이 단어를 정의하는 대목에서, “사물 간의 관계: 매우 밀접한 연결 또는 결합; 매우 가까움(very close)”이라고 반복 설명하며, 독자와 좀 더 ‘친밀해진’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단어의 어원을 더 거슬러 라틴어 intimāre까지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으로 들이거나(put or bring into), 몰아넣거나(press into), 알리다(to make known), (법적 절차로) 통지하다(notify by legal process)”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to intimate”라는 동사의 한 정의는 “공식적으로 알리다, 공표하다, 선언하다”이며, 옛날에는 “지식을 전달하다(communicate (knowledge)), 전쟁을 선포하다(declare war)” 등의 뜻으로도 쓰였다. 그러므로 친밀성(intimacy)은 태생부터 부분적으로는 **공식적이고 비개인적(formal and impersonal)**인 흔적이 찍혀 있으며, 이는 “가까운 결합(close unions)”이 무(無)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형성되고(formed), 공표되고(announced), 공적 공간 안팎으로 유도(coaxed)되어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음향적 친밀성(sonic intimacy)**은 그 무형성(intangibility)과 내재된 시간성(temporal dimension) 덕분에, 그리고 귀가 눈이나 손처럼 선별적으로 취사 선택하기 어려운 기관이기에, 특히나 독특한 **가능성(affordances)**을 제공한다. 실은 귀는 회피하기가 쉽지 않아, 어떤 소리든 주변에 있으면 들어오게 마련이다—귀마개(earplug)라는 불완전한 차단 수단을 선택하지 않는 한 말이다. 목소리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어머니의 입(mother’s mouth)이야말로 음향적 친밀성의 극치(네 플루스 울트라, ne plus ultra)처럼 여겨질 수 있고, 이후에는 연인의 속삭임(혹은 낮은 목소리)이 그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보다 덜 유쾌한 조우들도 고려해야 한다: 반갑지 않은 휘파람 소리(catcall), 추하게 취한 이의 구애, 낯선 이가 내뱉는 무례한 말 등이 그것이다.
음향적 친밀성의 전형적인 예는 부모가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상황이나, 연인들이 이불 속에서 내는 속삭이는 신음소리(whispering whimpers)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당나귀의 반가움 없는 울음소리(braying) 속이거나, 비 오는 날 JFK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갈 때 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매끈하지만 상업화된(pop star) 목소리 같은 데서 말이다. 바르트가 말했듯 푼크툼(punctum) 자체도—바르트에게 이는 언제나 “사랑의 질서(order of the loving)”에 따라 전개되는데—결국 우연적 지각(contingent perception)의 문제이지, 객관적 정체성(objective identity)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번엔 “바라보는 사람(eye of the beholder)”이 아니라 **“듣는 사람(ear of the listener)”**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스티븐 코너(Steven Connor)는 말한다. “목소리의 모든 것이 영혼(soul)을 갖는 건 아닌 듯하다. 하지만 목소리로 인식되는 것, 혹은 목소리가 될 가능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그 역시 영혼의 가능성을 같이 불러일으킨다.” (Dumbstruck, 25쪽, 강조 추가) 이 문장은 내 현재 생각 실험을 암시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그 생각 실험에서 ‘목소리(voice)’는 특정 소리의 내재적 특성이라기보다, 출현(emergent)적이고, 이행적(transitive)이며—어쩌면 전이(transductive)적인—속성으로, 그 소리에 영향받은 주체(그리고 동시에 주체에게 검증되는)에 의해 경험되는 것이다. **“세계의 목소리(vox mundi)”**는 수많은 대사(ambassadors)를 동원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다—비록 각각 구체적인 사건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리고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을 수도 있는) 공동 관심사일지라도 말이다.
어머니나 연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최소한 우리가 자기방어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음향 필터를 설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더 넓은 환경에서 나오고 있는 “다른” 목소리들—경고나, 충고, 기도, 시위, 호소, 제안, 논평—을 듣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만약 우리가 하루 종일, 또 밤새 모든 소리를 목소리로 대하며, 일일이 반응하려 든다면 금세 미칠 것이다.²⁷ 그것은 정신 붕괴로 가는 지름길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그 감수성 안에 삽입된 비유적 교훈(figurative lesson)에 좀 더 인내심 있게 접근한다면, 불협화음을 내는 합창(chorus) 속에서도 특정한 목소리들이 떠오르게 둘 수 있다. 그것들은 심지어 세속적(속세적) 천사(mundane, secular angels)로서, 우리의 행동(또는 우리 ‘종(species)의’ 행동)에 관한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설령 그 천사가 대만에서 만든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 형상을 하고 있거나, 짝을 찾지 못하는 개구리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도 말이다. 전자는, 혹독하고 비위생적인 조건 아래서 하루에 1달러도 못 받고 그 장난감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젊은 이의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후자는 우리의 경솔한 경제 정책이 종(種)의 생존 시도를 영원히 좌절시켰음을 알려줄 수도 있다. 물론 이 목소리들은 자기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존 케이지(John Cage)를 약간 비튼다면—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왜 굳이 친밀성이라는 요소를 강조해야 할까?
우리는 전 지구적 합창(global choir)을 그저 일반적이고(public) 사회적인 영역으로 유지하면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치는 영역(register)을 배제해 버리게 된다. 그렇게 했을 때 제시되는 청취 주체(listening subject)는, 그저 추상적인 존재—어떤 도식적이고 휴리스틱한 장치—가 되어, 수동적으로 음향 자극을 수용한 다음 예측 가능하고 인과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귀(ear)가 단지 사이버네틱한 수신기일 뿐, 인간성(humanity)의 꼬인 목재(crooked timber)로 이루어진 아주 고도의 공명(resonant) 물질을 통해, 감정(affective) 경험을 예측불가능하게 매개하는 정교한 장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덜 들리긴 해도, 실제로는 나무들 자체와 그 위를 기어오르는 동물들도 꼬인 목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세계의 목소리”가 정말 ‘목소리’로 간주되어(그리하여 잠재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타자성(alterity)의 매개체로 주목할 가치가 있게 되려면), 그건 반드시 친밀한 방식으로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소음(noise)이나 정적(static)으로 인식될 뿐이다. 소로(Thoreau)는 이를 잘 이해했기에, 일과 시민 생활의 귀를 멀게 하는(‘귀를 막는’) 방해물들로부터 벗어나, 갓 해방된 상태의 귀를 가지고 환경을 들으려 애썼다. (이건 상당히 특권적인 결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가능하게 해 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어쩌면 그녀는 열정 가득한 아들의 하루하루 깨달음을 가능한 한 인내심 갖고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래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과학자들도, 혹등고래 노래(whale songs)를 들어 보면서 특정 고래 개체에 특정 노래를 연결 짓기 시작할 때, 이 점을 이해한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Theodore)도, 운영체제 사만다(Samantha)와 신혼기에 접어들며, 갑자기 열린 마음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랑하고—동시에 사랑받고—싶어 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깨닫는다. 그 경험은 곧, 현대 에로스가 태생부터 본질적으로 기술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ASMR의 팬들 역시 이를 이해한다. 그들은 유튜브에서 낯선 사람들이 들려주는 속삭임과 부드러운 휘파람 소리에 몸이 짜릿해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일상 업무 속 잠시의 휴식 순간마다 이를 안다. 자본화된 양심(capitalized conscience)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대신 새소리나 바닷소리, 피아노 소리, 혹은 오디오북 소리를 들을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