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쇼와 드라마를 위한 화면해설(Descriptive Video Services, DVS)을 쓰는 작가들의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주요 주요 관심사는 시각 화면 중 가장 중요하고 생략 불가능한 부분들을 선택해서, 장애 또는 다른 이유로 인해 화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화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듣고 ‘눈에 선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눈이 보는 것을 출발어로, 귀에 들리는 것을 도착어로 삼는 이러한 종류의 특수한 번역에 깃든 심원한 직서주의가 ‘이루 말 할 수 없는’ 분위기의 잔인한 환원, 앰비언스의 스트립 쇼, 또는 열림에 대한 무자비한 닫힘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무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생각은 번역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감각적 감각질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공유하는 암묵적인 교리입니다.

DVS 스크립트는 콘텐츠의 원본 오디오가 비는 시간에 끼어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리 경쟁이 몹시 치열합니다. 경쟁 상대에는 이른바 다이제틱 사운드와 넌다이제틱한 소리가 모두 포함됩니다. (애초에 맹인에게 넌다이제틱 사운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하겠죠.) 어떤 종류의 번역이라도 이렇게까지 극심한 제약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번역 문제의 핵심이 자리합니다.

번역의 미덕은 원어에 대한 완전한 종속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DVS의 경우, 도착어(여기서는 음향적으로 제공되는 해설방송)에 허용된 공간이 너무 좁은 나머지 작가들은 때때로 해설의 충실도를 희생하거나, 아니면 지연된 해설에 만족해야만 합니다.

DVS에게 가해지는(혹은 허락된) 이중 구속, 소리와 소리 사이, 말과 말 사이의 좁은 공간은 우리가 공유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공통 기반입니다.

우리가 장애에 관해 얘기했을 때, 나는 그것을 극복하는 대신에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제약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욕망을 발명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서 새로움이란, 욕망할만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