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자신이 연단에 서서 군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혼잡한 웅얼거림이 청중들의 안쪽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점점 강화되어 울부짖음, 함성, 무시무시한 소동이 된다. 결국 사방에서 리듬을 맞추어 다음과 같은 고함 소리가 울린다. “나가라! 나가라!” 나는 이 순간 갑자기 깨어난다. 개 한 마리가 이웃 정원에서 짖고 있었고, “나가라!”라는 고함 소리는 개의 각각의 “왈, 왈” 소리와 뒤섞여 있었다. 이 순간을 포착해야 한다. 이제 막 나타난 깨어난 자아는 아직 거기 있는 꿈 꾸는 자아에게 돌아서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잡았다, 이놈. 너는 나에게 소리치는 군중들을 보여주었지. 하지만 단지 개가 짖고 있었을 뿐이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라. 난 널 붙잡았다. 나에게 네 비밀을 넘기고, 네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다오.” 꿈의 자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잘 봐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와 나, 우리는 바로 이 점에서 서로 다르다. 너는 개 짖는 소리를 듣기 위해, 짖는 것이 개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중대한 오류다! 너는 의식하지 않은 채로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너는 기억 전체, 너의 축적된 전 경험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갑작스러운 압축(resserrement)을 통해 들린 소리에 기억의 단 한 지점만을, 즉 이 감각과 가장 유사하고 감각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기억만을 제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러면 감각은 기억으로 뒤덮인다. 게다가 기억을 감각에 완벽하게 부착시켜야 한다. 그사이에는 아무리 작은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그렇지 않으면 너는 곧바로 꿈속에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조정은 감각과 기억에 대한 주의를 통해서만,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감각과 기억의 동시적 긴장을 통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이는 재봉사가 ‘가봉된' 옷을 입혀볼 때 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그는 핀을 꽂고, 몸에 알맞게 천을 잘라 조인다. 따라서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때조차, 깨어있는 상태에서 너의 삶은 고된 작업의 삶이다. 너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하고 매 순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는 감각들 중에서 선택하고 있다. 잠들자마자 다시 나타날 수천의 ‘주관적인' 감각을 의식에 배제하기 때문이다. 너는 극도의 정확성과 섬세함을 가지고 기억들 중에서 선택하고 있다. 현재적 상태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기억을 쫒기 때문이다. 네가 끊임없이 수행하는 이 선택, 즉, 계속적으로 갱신되는 이러한 적응은 양식(bon sens)라 불리는 것의 본질적 조건이다. 그런데 적응과 선택은 너를 끊임없는 긴장의 상태로 유지시킨다. 대기의 압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는 당장은 그것을 자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너는 피로해진다. 양식을 갖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방금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확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와 다르다. 나는 네가 쉬지 않고 기울이는 노력을 단순히 그만둘 뿐이다. 너는 삶에 달라붙고, 나는 삶에서 떨어진다. 나에게 모든 것은 무차별해진다. 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잔다는 것, 그것은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확히 무관심해지는 만큼 잠들게 된다. 아이 옆에서 잠든 어머니가 천둥소리는 듣지 못해도 아이의 숨소리에는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에 대해 정말로 자고 있었던 것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에 대해서는 잠들지 않는다.

내가 잘 때 무엇을 하는지 물었는가? 네가 깨어 있을 때 무엇을 하는지 말해주겠다. 너는 나-꿈의 자아인 나, 네 과거의 총체인 나-를 붙잡아, 점차 수축시켜서 네가 현재의 행동 주위에 그리는 아주 작은 원환 속에 가둔다. 이것이 깨어있다는 것이고, 정상적인 심리적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쟁한다는 것이고, 의지한다는 것이다. 꿈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네가 자신을 내버려 두고 한 점에 집중하기를 게을리하자마자, 네가 의지하기를 그치자마자 자연스럽게 다시 도달하게 되는 상태이다. 만일 네가 계속 고집하며 무언가 설명을 듣기를 요구한다면, 네가 네 아네 지닌 모든 것을 관심을 끄는 지점에 순간적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너의 의지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묻도록 하라. 그러나 그때에는 [꿈의 심리학이 아니라] 깸의 심리학에 문의해라. 네게 응답하는 것이 그 심리학의 주요한 기능이다. 깨어 있다는 것과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의 자아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말하게 내버려 둔다면 그는 우리에게 다른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결론을 내릴 시간이 왔다. 꿈과 깸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것이다. 깨어 있건 꿈꾸건 간에, 동일한 능력들이 수행된다. 그러나 그 능력들은 한 경유에서는 긴장되어 있고, 다른 경우에서는 이완되어 있다. 꿈은 집중의 노력을 결여한 정신적 삶 전체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각하고 기억하고 추론한다. 꿈꾸는 자에게도 지각, 기억, 추론은 풍부할 수 있다. 정신의 영역에서 풍부함은 노력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을 요하는 것은 조정(adjustement)의 정확성이다. 개 짖는 소리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군중의 울부짖음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소리가 거기서 다른 기억들보다 우선적으로 개 짖는 소리의 기억에 결합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것이 개 짖는 소리로 해석되려면, 즉 실제로 개 짖는 소리로 지각되려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꿈꾸는 자는 더 이상 그 노력을 기울일 힘이 없다. 그는 이를 통해,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깨어있는 사람과 구분된다."

<정신적 에너지>, 앙리 베르그송, 엄태연 역, 117-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