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활송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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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활송장치(chute)¹

방금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5분 전과 동일한 땅에 도달할 것이라는 점은 현실적이다. 그 생각은 방금 전까지의 세계가 조금 있다가도 유지될 것이라는, 비교적 신뢰할 만한 상식 추론에 기대고 있다. 이 추론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빈도적으로 더 자주 맞는 것으로 밝혀져 왔기 때문에, 거의 사실 같다. 현실적인 것은 우리를 하루하루 굴복시켜, 이윽고 엘리베이터처럼 변함없이 변화에 대처할 것을 요구하는 근로계약서에 사인하게 만든다. 나는 임금노동 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계약서는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또 재난 경보 경고음 속에서도 당신의 모습을 일터에 보일 것을 요구하는 현전주의에 기반하고 있다.² 이제 당신의 특성은 당신의 부재를 통해서만 증명될 것인데, 다시 말해 이 계약서는 당신이 특성을 갖지 않아야 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 당신은 법정 근로 시간으로 규정된 시간의 바깥에서도 자유를 갖기보다는 회복과 재생산을 위한 여가 시간의 전면적 재배치에 힘쓸 것이고, 당신이 꿈꾸던 일탈은 이제 가장 진부한 방식으로 미리 주어질 것이며, 당신의 몸과 마음은 사고로 다치거나 걷잡을 수 없는 모종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자해하지 않음으로써 자발적으로 시스템의 정상 작동 상태에 조율되어야 할 것이다. 입에 밥을 넣기 위해 노동을 하고, 노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 입에 밥을 넣는 순환논리가 어느덧 자연스럽게 스며든 이 삶은 당신 자신을 위해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선택지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정황들은 현실적이다.

그래서 당신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이 장치가 오늘도 어김없이 당신이 내려야 할 곳에 당신을 내려줄 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던 어느날, 창밖에서 전쟁의 시작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당신은 이 소리가 만약 농담이나 오보가 아니라면 오히려 나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고 여기게 된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세계는 단지 운이 좋아 유지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언제나 가능했고 앞으로도 언제든 가능할 바로 그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³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당신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앞에서…

곰곰이 생각건대, 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5분 전의 세계와 5분 후의 세계가 동일할 것이라는 믿음은, 세계가 마침내 종말에 이르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선택받은 이들이 지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시에 하늘로 솟구칠 것이라고 믿는 휴거설만큼이나 근거가 없는 것 같다.⁴ 차이가 있다면 휴거설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언제든 심판에 의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같은 땅을 밟을 거라고 믿는 일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두 믿음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5분 뒤에 같은 땅을 밟을거라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의 기반(ground)이 있기 때문이다. 기반에 대한 믿음의 기반. 이 믿음의 기반은 아까 밟은 땅이 단단했으므로, 조금 있다가 갑자기 물렁물렁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예상하는 귀납적 추론에 근거하여 형성되어 있다. 기반에 대한 믿음은 다른 말로 자연의 균일성(Uniformity of nature, 이하 UN)에 대한 믿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UN에 대한 믿음은 과거에 자연이 이러이러했다는 경험적 근거에 기반하여, 앞으로는 저러저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로써 유지된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관찰된 것에 대한 지식이 관찰되지 않은 것에 관한 지식을 보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가능했거나 유지되어 왔던 것이 내일에도 계속해서 가능하거나 존속하리라고 여기는 일에 어떤 합리성도 없다는 것이 귀납적 추론의 고질적인 난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귀납의 문제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미래를 알거나, 혹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추이를 바탕으로 나중의 일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래서 알 수 없다는 점에 있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알지 못하는 것은 미래가 불확실한지 확실한지, 미결정적인지 결정적인지, 그래서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아닌지 그 자체다.⁵ 이것이 이른바 귀납의 곤경이라고 불리는 문제의 핵심에 자리한다. 게다가 이 곤경은 아직 관찰되지 않은 것에 관한 지식에만 적용될 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했고 그래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내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러셀의 ‘세계 5분 전 가설’은 우리가 과거에 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모든 것에 기반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가설은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도 5분 전에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반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필요한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도 5분 전에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반증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지식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과거와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⁶ 이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가 5분 전의 그 세계와 동일할 것이라고 믿는 일이 철저하게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강성 회의주의자에게 언젠가 도래할 전천년 휴거설의 약속된 참과 엘리베이터 기계장치의 개관구조에 대한 믿음은 동일하게 근거가 불충분하다. 그러나 어떤 임금노동자가 마침내 결단을 내린 하느님 아버지가 선택된 이들을 하늘로 들어 올려줄 것이라는 믿음과 자애로운 기계장치가 우리를 높은 곳으로 상승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일이 둘 다 터무니없다고 말한다면, 최선의 경우 그는 다소 현실 감각이 없다고 여겨질 것 같다. 현실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능한 모든 것을 고려하기보다는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경우, 즉 전형적인 경우를 우선 고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귀납적 추론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인식적 회의주의의 불구덩이 속에서 자신도 함께 불살라질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이는 회의주의자가 현실 감각이 아니라 가능성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성 감각은 현실과 똑같이 존재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내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는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⁷ 미리 밝혀두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실은 시뮬레이션이고, 우리는 통 속에서 포도당과 전기 자극을 공급받고 있는 뇌 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은 이 글의 큰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비록 ‘기반의 기반 없음’이라는 상기의 구상이 ‘운 좋게 얻어진 참’에 관한 인식론적 회의주의 사고실험을 용도변경 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것은 사실이지만.⁸

그보다 나는 우리가 언제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참인 앎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죽을 때까지 검증할 수 없거나 좀 이상한 경로를 통해 얻어진 참에 대한 믿음을 앎의 기반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구상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⁹ 그런 종류의 믿음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전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정신으로 간주되는 상태를 위한 필요조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참은 어쩌면 운 좋게 얻어진 참인 인식적 요행의 결과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종류의 지식은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일 수 있다.

만약 한 여행객이 낯선 곳에서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이는 여행객의 탁월한 인식 능력 덕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정보가 요행히도 참이었던 덕을 본 것이다. 물론 여행객도 고양이가 아닌 사람에게, 어린이보다는 어른에게, 관광객 차림이 아닌 원주민처럼 보이는 이에게 묻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어떠한 선별 행위를 수행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여행객의 적절한 인식 노력, 능력, 덕, 내성적 판단은 참인 지식을 얻기 위한 궁극적 요건이 아니다. 인식자의 행위자성이 참된 앎을 얻는 데 필수적이지 않다면, 인식자의 인식 행위는 어떠한 경위로도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지 않다.¹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