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적 회의주의의 무기고에서 발견되는 모든 불안한 수수께끼와 역설들 — 그것들은 지식-요구의 형성 및 정당화의 방법과 패러다임에 대한 체계적이고 단편적인 검토로 이해되는데 — 중에서 특히 한 가지 문제가 인지적 골칫거리의 끝없는 원천임이 몇 번이고 증명되었다. 철학자자들과 철학적 정신을 가진 몇몇 과학자와 통계학자들 몇 명(예를 들어 흄, 굿맨, 퍼트남, 스테그뮐러, 볼츠만, 드 피네티 등)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와 이 문제의 변주가 지닌 심각성을 경시하고 회피하거나, 기적적으로 사라지기를 바라며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포기해왔다. 이 문제는 강한 버전의 흄의 귀납 문제에 지나지 않는데, 이 문제는 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진한 형태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한 모든 인식론적 프로젝트의 토대를 순식간에 집어삼킬 수 있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초산(超酸)으로 변질될 운명에 처해있다.
회의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철학자들은 이 문제가 지닌 광범위한 함의를 깨닫는 순간 두려움에 떨며 후퇴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이는 귀납의 문제를 제기한 흄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무심코 던진 회의론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서두른다. 그러나 체계적인 회의주의는 폭발적인 화학 연쇄 반응과 비슷해서, 일단 불이 붙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불을 끄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거기에 물이라도 붓는 순간 불이 붙을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까지 불이 번진다. 진정한 철학자는 그가 속한 곳과 상관없이 불이 어디까지 번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무시하거나 카펫 밑으로 쓸어 버릴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 조사해야 할 스캔들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회의론을 통해서만 철학은 사고의 안일함과 확고한 신념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다. 하나의 철학은 — 그것이 유물론이나 현실주의, 혹은 경험주의나 합리주의와 결탁했든 — , 엄격한 회의주의의 힘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도전에 응하지 않는 이상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체계적 회의주의의 탐구력을 무시하거나 그 난점을 단순히 참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념적으로 가장 엄중한 이성적 비판적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흄의 문제를 인지 과학, 특히 인공 일반 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프로그램을 포함한 지식 철학과 심리 철학의 귀납주의와 연역주의 경향에 대한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비판으로 다시 적용하려고 한다. 여기서 귀납주의와 연역주의란 오직 귀납적인 방법이나 순전히 연역적인 방법만으로 지식 주장을 형성하거나 정신의 구조화 능력을 실현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지식과 정신에 대한 모든 접근 방식을 폭넓게 의미한다. 이처럼 흄의 문제에 다시금 개입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a) 귀납의 문제에 대한 흄적 형태를 넬슨 굿맨이나 힐러리 퍼트남과 같은 이들에 의해 수행된 보다 최근의 재구성으로 확장하는 것다. 이 작업은 문제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귀납 문제의 흄 버전에서 하나로 취급되었던 세 가지 곤경을 구분하고 개별적으로 다룰 수 있게끔 한다. 이러한 곤경은 각각 *소급(retrodiction), 예측(prediction), 그리고 형식화(formalization)*의 진퇴양난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은 세 가지 수준에서 귀납적 추론의 인식론적 지위에 도전한다:
(1) 과거의 관찰로부터 도출된 경험적 자료 및 역사에 관한 정확성 및 사실성을 보장하는 기억에 대한 신빙성(reliability) 가설.
(2) 증거에 의해 확인된, 유사법칙적(law-like) 진술의 신빙성 가설. 이때 증거란 확증하는 가설에 있어서 증거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투사 가능한 술어와 함께 단일한 긍정 사례가 확증의 충분한 기준으로 간주되는 귀납적 확증 이론, 혹은 가설이 반례 혹은 단일 부정 사례를 테스트하는 방식으로 가설을 선택하는 연역적 확증 이론을 따른다.
(3) 순전히 귀납적 행위자 또는 지능이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그것이 거주하는 정신의 (귀납적) 모델에 대해서도 자의적이지 않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귀납적 모델의 형식적, 인식론적 완결성.
(b) 이 분석과 함께, 우리는 또한 심리 철학과 AGI 프로젝트에 대한 귀납 문제의 이입(import)에 초점을 맞출 것다. 우리는 귀납의 인식론적 정당성에 도전하는 동일한 곤경이 지능을 단순히 예측 귀납과 동일시하는 AI의 어떤 유형이 갖는 일관성도 위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인데, 여기서 지능은 단순히 예측적 귀납(predictive induction)과, 그리고 예측은 정보-이론적 개념의 압축(compression)과 동일시된다. 흔히 알고리즘 정보 이론에서 제시되는 오컴의 단순성 원리에 대한 형식적-계산적 설명 — 특히, 규칙성과 압축의 이중성으로 요약되는 레이 솔로모노프(Ray Solomonoff)의 귀납에 대한 설명 — 은 귀납의 인식론적 난제를 우회한다고 가정되곤 한다. 그러나 단순성의 원리가 실용적 도구로서 의미를 갖는 이론적-의미론적 맥락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기존의 모든 귀납적 계산 모델의 초석으로서 오컴의 면도날을 형식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귀납의 문제가 안고 있는 곤경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자의성 및 계산 자원(computational resources)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새로운 복잡성을 초래하게 된다.
일반 지능을 순수 귀납적 추론으로 모델링하는 것은 현재 AGI 연구의 지배적인 경향에 있어서 일반 지능의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지표로 간주된다. 같은 맥락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은 문제를 해결하는 지능의 양적 차원으로부터 질적 차원을 구분하는 것에 인간 정신의 독특한 기준이 깃들어있다고 주장하는 예외주의에 반대하는 증거로써 일반 지능의 귀납적 모델을 취급한다. 그러나 앞으로 논증하겠지만, 귀납에 다른 모든 인식 활동을 대체할 수 있는 특권적 역할을 부여하는 수단으로서 오컴의 면도날을 형식적으로 일반화한 것, 그리고 일반 지능과 귀납의 등식은 정확히 인간의 경험적-인지적 편견의 결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결론적으로, 나의 목표는 귀납의 문제로 표현되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힘이 철학적 도그마와 인지적 편견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귀납적 정신 모델과 AGI의 귀납주의적 경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있다.
특수성에 관계없이 모든 AGI 모델은 합리성에 대한 암묵적 모델(implicit model of rationality)을 기반으로 한다. 초기 카르납 학습 기계(Carnapian learning machine)에서 최적 또는 보편적 학습 기계의 모델로서 솔로모노프의 예측, 일반 지능에 대해 마커스 후터(Marcus Hutter)가 제안한 압축 방정식에서 최근에 엘리에저 유드코프스키(Eliezer Yudkowsky)가 제안한 합리적인 AGI의 베이지안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귀납주의 모델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경향의 사회문화적, 정치적 차원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귀납주의적 합리성 모델이나 일반 지능에 대한 접근 방식이 초지능에 대한 토속설화에 의해, 혹은 더 나쁘게는 도구주의적 또는 사회적 다윈주의적 지능 개념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도용되기 쉬운 이유가 정확히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보다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사회-정치적 비평은 그 자체로는 인지과학의 위와 같은 경향에 도전하기에 결코 적절하지 않으며, 잘 구성된 합리주의적 비평조차도 일반 지능이나 합리성에 대한 모델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지에 대한 논쟁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은 대신 그 자체의 가정들이 의문에 부쳐져야 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오류가 있음이 폭로되어야 한다.
흄의 귀납 문제의 정확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 문제를 좀 더 일반적인 형태로 재구성한 다음, 흄이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하지만 그 전에 연역과 귀납에 대한 간략하고 초보적인 정의를 제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연역은 전제와 결론을 연결하여 단계별 논리 규칙에 따라 전제가 참이면 도달한 결론도 필히 참이 되도록 하는 추론의 한 형태로 정의할 수 있다. 연역적 추론은 흄이 말하는 증명적 추론(demonstrative inferrence)이다. 흄적 의미에서 증명적 추론은 엄밀히 말해 순수한 논리적 결과 관계가 얻어지는 추론이다. 이러한 논리적 관계에는 두 가지 형식적 특징이 있다: (1) 결론의 내용이 전제의 내용을 넘어서지 않는다. 따라서, 흄적 의미의 증명적 추론은 비확장적(non-amplitative) 추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이미 알려진 내용 외에 내용을 늘리거나 다른 것이 추가되지 않으며, (2) 전제의 진실이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증명적 추론은 진리를 보존한다(truth-preserving). 중요한 것은 로렌조 마그나니¹와 같은 일부 주석가들이 말하듯 비확장성(non-ampliativity)과 진리 보존성(truth-preservation)이 서로 다른 두 가지 특징이며, 결코 서로를 수반(entail)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다. 진리 보존이 의미하는 것은 전제의 진리가 결론의 진리로 옮길 수 있다는 것(transferability)뿐이다. 이것은 내용의 증가 또는 부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새로운 전제가 추가되면 결론의 진실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단조성(non-monotonicity) — 이를테면 하부구조 논리에서 포착된 — 이 증명적 추론의 비확장적, 진리 보존적 특성 모두와 대조된다는 마그나니의 주장은 혼란에 기반한다.
연역적-증명적 추론과 달리, 귀납적 추론은 깔끔하게 공식화할 수 없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귀납적 추론은 전제가 — 연역적 결론과는 구별되는 — 추론의 결과에 대해 인과적, 통계적, 계산적 측면에서 강력한 지지를 제공하는 추론의 한 형태다. 연역적 추론에서 결론의 진실은 논리적으로 확실한 반면, 귀납적 추론에서 결과의 진실은 뒷받침하는 증거에 비례해서만 *개연적(probable)*이다. 따라서 증거가 쌓일수록 가설에 대한 유효한 진술을 뒷받침하는 정도에 따라 거짓 가설은 — 일반화하자면 — 거짓일 가능성이 높고, 같은 맥락에서 참 가설은 — 일반화하자면 — 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증거에 대한 이러한 의존성은 귀납적 추론이 우연적이고 비단조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단조성이란 새로이 추가된 전제가 귀납적 결과에 대해 이미 확립된 지지도를 크게 높이거나 낮춤으로써 결론의 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귀납법의 중요성은 법칙(laws)과 비법칙(non-laws)을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귀납의 문제가 드러난다.
위와 같은 설명을 통해 이제 흄의 귀납 문제는 특수한 종류의 비-연역적 추론(예를 들어, 열거에 의한 귀납)으로 좁히지 않고도 다음과 같이 매우 일반적으로 공식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