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나 어린이들과 함께 - 학교나 그 외의 장소에서 - 혹은 친구나 활동가들과 함께 자기 자신의 삶을 건설하고 조금이라도 생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자기 자신과 신체의 관계, 사물과 지각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과도 힘을 합쳐 그것을 수행하는 것, 이것은 더더욱 근본적이거나 긴급한 혁명적 대의를 배반하는 것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무엇을 혁명이라고 볼 것인가 하는 점에 관계된다! 혁명이란 모든 소외관계 - 노동자에게 덮치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이나 어린이나 성적 소수자 등에 덮치는 것, 또 다른 형태의 감성에도 혹은 소리나 색채나 사상의 기호(嗜好)에도 덮치는 것 등 모두를 뭉뚱그려 - 를 끝장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어떤 영역에서도 혁명은 먼저 혁명에 의해 욕망의 에너지 해방이 있어야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의 지층화를 관통하는 연쇄반응만이, 현재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권력구성체를 재검토하는 불가역적인 과정을 촉진할 수 있다.”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200-1쪽.


“동일성은 터무니없이 감동적인 꿈과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할 더 좋은 것이 없을 때도 자기 자신이 되기를 굼꾼다.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특이성을 잃어버렸을 때도 자기 자신과 자기 확인을 꿈꾼다. […] 동일성은 (우리를 동일화하는 통제 체계를 포함하여) 안전과 연결된다. 동일성은 해방된 존재, 그러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헛되이 해방된 존재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강박관념이다.

[..]문제가 되는 다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즉 사태가 해방되자마자, 사태는 표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돈은 투기 속에, 성은 성에 대한 정의할 수 없음 속에, 생산은 이유 없이 격화된 경쟁 소게, 시간은 기원에 대한 결정 불가능한 계산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는 자체의 타락한 결과, 즉 해방에 굴복했다. 철학적 의미에서 자유는 관념이며, 자유를 실현하면서 우리는 자유의 관념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욕망의 이상이 실현되면서 동시에 욕망의 관념이 희미해지는 것과 꼭 같은 경우이다. [..]자유는 인간 권리의 자유를 대신하는 모든 담론 속에서 허수아비처럼 끌려가며 비참하게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존재를 존재의 권리로, 차이를 차이의 권리로, 욕망을 욕망의 권리로 대체한 모든 형태들에 의해,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있는 그대로 있을 권리로, 자유의 터무니없는 형태인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고자 하는 권리로 대체한 모든 형태들에 의해 비참하게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자유의 유토피아가 실현되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의 유토피아가 아니며, 서서히 다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은 이전의 형태들, 낡은 형태들, 예속된 형태들이다.

[…]

자유를 초월하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끝을 초월하면 무엇이 있을까?’와 동일한 딜레마이다.

[..]사실 그것은 주체로서 자기 삶의 객관적 조건을 책임지는 대단히 상대적인 자유이다. 내가 객관적 조건을 따르는 한, 나는 여전히 객체이며, 또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 나는 이러한 자유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게임 속에서만, 매우 미묘한 게임의 자유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 경우 역설적으로 임의적인 게임 규칙을 통해서 나는 해방된다. 현실 속에서 내가 내 자신의 의지에 연결되는 데도 말이다.”

장 보드리야르. “자유의 문제를 해결 지으려면” in. 『불가능한 교환』. 66-70쪽